민수기

민수기 20장 1~13절

예주아부지 2025. 5. 7. 23:18

생명의 삶 큐티
민수기 20장 1~13절

1 온 이스라엘 회중이 첫째 달에 신 광야에 도착해서 백성이 가데스에서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미리암이 죽어 땅에 묻혔습니다.

이때는 출애굽 40년 첫째 달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곧장 호르산으로 향했고 거기서 아론이 죽었는데, 그때가 출애굽 40년 5월 1일이었기 때문이다(민 33:38). 이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죽었는데, 본 절의 사건과 함께 이곳 신 광야에서 4~5달쯤 머물렀던 것이다.

한편 미리암은 모세가 아기일 때 갈대상자에 넣어 애굽의 공주를 만나게 했던 사건을 보면 모세보다 열 살가량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따라서 대략 130세쯤 죽은 것 같다.

아무튼 이제 38년 광야를 방황하는 생활을 끝내고 다시 가나안 땅 앞에 이른 것이다. 이후로는 출애굽 2세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2 회중들이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해 모여들었습니다.

본래 이곳은 광야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는데, 이곳에 물이 없던 것이다. 진짜 힘든 시기는 바로 있어야 될 것이 없을 때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수는 물론 가축들에게 줄 물까지도 여기서 얻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비축했던 물들도 다 떨어졌을 시기라 그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3 그들이 모세에게 대들며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쓰러져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4 당신은 왜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까지 끌고 와서 우리와 우리 가축들이 여기서 죽게 하십니까?
5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 끔찍한 곳으로 데려왔습니까? 여기는 씨 뿌릴 곳도 없고 무화과나 포도나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단 말입니다!”

광야 2세대의 불만은 광야 1세대의 ‘르비딤 사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처럼 죄는 전염되고 이어지는 특성이 있다. 본받지 말아야 할 것들은 너무도 쉽게,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모습에 들어온다.

또한 무엇보다 그들의 불만은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첫째, 1세대들이 광야에서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들이 여기까지 이른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광야에서의 죽음은 오히려 형벌에 가까운데 어째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하는가. 둘째, 이스라엘 백성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모세와 아론이 아닌 하나님이다. 불만을 가지고 싶으면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옳다. 셋째,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 이른 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정착할 예정이 없는데, 왜 씨 뿌릴 곳이나 수확할 열매를 찾는가?

6 모세와 아론이 그 무리에게서 물러나 회막 입구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8 “지팡이를 들어라. 그리고 너와 네 형 아론은 저 회중을 모아라.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서 저 바위에다 말하면 그것이 물을 낼 것이다. 너희는 그들을 위해 물이 바위에서 나오게 해 저 회중과 그들의 가축들이 마실 수 있게 하여라.”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의 불만을 들어주셨다. 징계하고 벌 주실 수도 있었지만, 용서하시고 은혜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 전에도 그랬듯 모세를 통해 공개적으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로 하신 것이다.

9 그러자 모세는 그분이 명하신 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10 그와 아론이 총회를 바위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불순종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겠느냐?”
11 그러고 나서 모세가 자기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치니 물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회중과 그들의 가축들이 마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다. 그 둘은 백성들의 악함에 질리고 화가 났다. 그러나 이는 은혜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대치된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그 중간 청지기가 왜 딴지를 거는가? 주인을 위한 종의 마음인가?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인 것이다.

모세의 불만은 반석을 내리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마지못해서 그들에게 물을 주시는 것과 같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막아버린 것이다.

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해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으니 너희가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3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곳을 므리바 물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그 백성의 악함을, 그들은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지 않은 백성을 징계하려 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징계하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여기서 또 한가지의 교훈이 있다. 모세는 율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가나안 땅 입구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일뿐이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 모세의 실수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모세와 아론의 잘못을 잘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가? 이견 그들의 행동은 정당해 보이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백성들의 악함은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을 징계하셨다. 우리도 가끔 이렇게 선을 넘을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종에 불과하며 우리가 할 것은 순종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인을 우리가 정죄해서는 안된다.

비느하스와 모세. 이 둘의 분노는 어떻게 다른가? 한쪽은 두 명을 한 번에 죽이는 살인이고, 한쪽은 소심하게 바위를 두 번 때리는 일이었다. 인간적인 눈에는 이것이 전부로 보인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가리는 선 넘는 월권행위였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악한 죄인에게도 답답한 나에게도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