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53~8장 11절
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7장 53~8장 11절
명절 이후에도 예수님은 성전에서 계속 말씀을 가르치셨다. (아마 1절에 감람산으로 가신 것은 기도하러 가셨던 것이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백성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런데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온 것이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실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까지 사랑의 표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는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고발할 것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로마법에 고발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묻는 문제였던 것이다. 즉, 로마법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시관들과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이나 모두,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잘 판단하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단순히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면 되는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도 그 여자를 돌로 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나중에 떠나간 것을 본다면). 이 문제는 예수님께만 문제가 되는 사건이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계속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많이 있다. 그러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모든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처럼 이런 문제를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다 손가락으로 어떤 글씨를 쓰셨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다그쳤다. 예수님이 곤란한 질문에 시간을 얻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간음한 여자보다 먼저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이다. 우리 역시 누군가 잘못한 사람을 판단할 때 먼저 이 말씀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 아마도 앞서 쓰던 내용을 마저 쓰신 것 같다. 그 글씨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말씀에는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을 썼다고 추측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더 양심적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혹은 반대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아니면 어떤 말씀을 썼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죄에 대한 말씀이었거나, 혹은 정죄하지 말라는, 용서의 말씀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사라졌다. 아마 더 지혜가 있는 어른들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의를 혈기로 착각하기도 하는 젊은이들이 하나씩 나갔다. 하나씩 나갔다는 것은 사실 그들이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서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깨닫거나 부끄러워서 떠나간 것이 아니다. 반대로 예수님 말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굴복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지려고 들었으나, 결국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진정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간음한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 떠나간 것이 아니다. 단순히 정말 떳떳하게 나설 수 없을 정도, 돌을 던져 그 여인을 죽일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그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 떠나가신 후에, 여자에게 말씀하신다.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없지 않으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사람들의 정죄가 의미 없음을 알려주셨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누군가의 죄를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정죄할 수 있는 자신이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회개를 권유하셨다.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 ‘삶의 방향을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분명, 죄 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특히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기에 다른 거짓말 하는 자들을 대하는 등 죄악 된 세상에서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는 누군가를 정죄해서은 안 된다. 이것의 가장 큰 차이는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차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고 있다면, 정죄의 죄를 범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잘못된 것을 말할 때, 지적하는 것과 알려주는 것의 차이가 바로 이 사랑의 차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더욱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가끔 가깝기 때문에 더 욕심이 생겨, 그 욕심이 사랑을 가릴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하는 그런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실 우리는 모두 죄가 있기 때문에, 죄지은 누군가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이다. 심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뿐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