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1~12절
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9장 1~12절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장애나 불행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병이 생기는 일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십계명에도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삼사 대까지 갚는다’고 나온다(출20:5). 또한 출애굽기 34장 7절에도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인지, 아마도 나면서 맹인된 사람은 부모나 조상의 죄로 인해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묻는 것은 좀 이상해보인다. 한 주석에서는 유대 랍비의 잘못된 가르침 중에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있다는 사상이 있는 데, 그런 사상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된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므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은 ‘낮’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낮에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덧붙이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 아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일일 것이다(제자들은 배우는 일). 그리고 또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또한 이렇게 죄에 묶인자, 질병에 고통받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일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셨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본문은 밝히고 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맹인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 분명히 그냥 말씀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이유는 그 맹인으로 하여금 순종을 보기 위해서 였다. 마치 구약시대의 나아만 장군처럼 소경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다. 안 그래로 답답한 그의 눈을 진흙으로 더 어둡게 하셨다. 그는 비틀거리며, 혹은 지팡이를 의지해서 천천히 실로암 못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속에서,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비로서 빛을 얻은 것이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맹인으로 구걸하는 모습을 알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 아냐?” “맞아. 그 사람이야” “아니야. 그냥 닮은 사람이야”
그때 그 맹인은 밝은 눈을 들어 말한다.
“맞습니다. 내가 그 장님으로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한 주석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불행을 계획하셨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일상적인 일, 좋은 일, 불행한 일 등 모든 일 가운데서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에 비교하면 찰나와 같은 시간이고, 태어나면서 맹인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기로 예정된 삶이라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맹인은 성인이 될 때까지(23절)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구걸만 하며 살아야 했다. 특히 죄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멸시를 받아야 했다. 그 고통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생은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기로 예정된 삶. 평생 지울 수 없는 예수님의 흔적을 갖고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불공평하다. 경제적 출발선도 다를 뿐더러, 갖고 태어나는 재능도 다르다. 게다가 노력할 수 있는 것 또한 재능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하는 것조차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갖고 태어난 재능에 대해 차별하지 않으신다. 다섯 달란트를 맡긴 사람과 두 달란트를 맡긴 사람에 대해 차별하지 않으신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도 그렇다. 아침에 일하러 온 사람과 하루가 저물어 갈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차별하지 않으셨다. 이 땅에서 본다면 불공평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이론보다도 더 공평하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상황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떻게 노력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 그 사랑에 우리가 어찌 불평할 수 있을까? 그 맹인이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왜 이렇게 오래걸렸냐고 예수님께 따질 수 있을까? 그 눈 뜬 감동 보다도, 이후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밝히셨을때,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그 감격이 더 클 줄 믿는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아무런 공로 없이, 그런 복을 받았다. 예수님이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생명의 빛을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