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 12장 20~36절

예주아부지 2025. 2. 14. 07:00

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12장 20~36절

명절에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그리스 사람)들도 있었다.

명절을 지키려고 온 헬라인은 이방인으로, 귀화하여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로 한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의 사회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들은 빌립에게 와서 간청했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했다. 이어 안드레와 빌립이 함께 예수께 말씀드렸다.

어떤 분의 설교를 찾아보니, 빌립이라는 이름이 헬라식 이름(뜻은 말(동물)을 사랑하는 자)이라고 한다. 따라서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는 빌립에게 헬라인들이 와서 간청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보통 이방인을 꺼려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는 빌립은 아무래도 헬라인들이 말을 붙이기가 쉬웠을 것이다(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헬라인과 교류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빌립은 먼저 안드레와 의논한 후 둘이서 함께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것이다. (혹은 빌립이 헬라어를 잘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는 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 받아야 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들을 만나실지 결정하신 것이 아닌 다른 답변을 하신다. 바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하신 것인데, 이것은 십자가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말씀처럼,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왜 헬라인을 만나시지 않고 (혹은 근처에 같이 왔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답변을 하셨는가?

첫째, 헬라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구원을 얻고자 했다. 그렇게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그렇게 구원은 예수님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를 따른다고 한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즉, 먼저 십자가 사역을 이루셔야 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밀알 하나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며,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은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가리킨 비유다. 이것은 이사야 53장 10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둘째,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에 따르면,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자기 나라에 초청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과 유대인 지도자들 간의 불화를 알고 있던 헬라인들이, 에뎃사의 왕 아브가르스의 초대편지를 전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아테네로 피신시키고, 또한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이 십자가 사역을 위해 왔으니, 헬라인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그리고 이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교훈을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어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그 길을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이시다.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쫒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불편함과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판단 등등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날마다 죽는 것’이 이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실제로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까지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몹시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버지여, 내가 이 시간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겠느냐?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 왔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사역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했다.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크게 기도한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답변해 주신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또 앞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씀을 주고받으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
그때 무리가 대답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계신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당신은 ‘인자가 들려서 올라가야 된다’고 하십니까? 이 ‘인자’란 누구입니까?”

이들은 구약의 말씀 등을 근거로 이야기한 것이다(시 110:4, 사 9:6, 단 7:14 등).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도 있다(사 53장). 말씀의 일부분만 아는 것은 말씀의 참된 뜻을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어둠이 너희를 삼키지 못하도록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 다니라. 어둠 속에서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에게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빛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다.

빛은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신다. ‘아직 얼마 동안'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빛은 비췸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깨닫게 하신다. 그 빛을 믿고 나아가면 빛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역이 힘든 일이셨지만 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내가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왔다”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신다. 그러시며 또한 우리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고난을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겨주는 것이고, 나 자신의 생명은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저주받는 길인가? 고통뿐인 삶인가? 아니다. 그 고난의 길이 진정한 평안의 길이요, 성공하는 삶이고, 항상 기뻐하는 인생이다. 복음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바보 같으나, 실제로는 빛 되신 주님을 따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