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9장 13~34절
유대인들은 눈을 뜨게 된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다. 왜냐하면 이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려면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눈에 발라주셨는데, 이 치료 행위가 ‘일’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바리새인에게 물어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사건의 전말을 듣자, 서로 분쟁이 일어났다.
“안식일을 어겼다면 죄인인데,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이 된 사람의 눈을 고쳐줬다는 역사는 없었다. 그 사건만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음을 부정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맹인 되었던 자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했는데, 너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으나, 바리새인들은 도리어 맹인 되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바리새인들이 맹인 되었던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한 것은,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을 출교 하기로 결정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22).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 죄인이라고 말하라는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의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게다가 맹인 되었던 사람은 그 기대와 다르게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대답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지만, 눈 뜬 사람은 아직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힘을 힘입은 경건한 사람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31).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제 그 부모를 찾아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주장해 왔던 내용을 부정하는 사건에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 부모 역시 그가 장님으로 태어난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진리를 떠나 단순히 억지를 쓰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코미디가 따로 없다.
부모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확실하게 답변하지 않는다.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출교 당하게 되면 회당 출입을 금하는 것부터 유대인들과 접촉하거나 매매하는 것도 금지된다. 말 그대로 살의 터전에서 완전히 추방당하는 것과 같다. (생명의 삶 설명에, 죽었을 때 곡하는 것조차 금지된다고 나온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그 부모조차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미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는 자식을 장님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오래전부터 맹인이었음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그 역시 부정할 수 없던 것이다. 그들은 최선의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묻지 말고 그 사건을 겪은 그 당사자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그 부모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사건이 이렇게 가까이 일어났음에도 세상적인 두려움에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러자 다시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자를 다시 불러 신문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는 그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 붙은 “그가 죄인임을 알고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우리는 판단하고 있으니, 동의하라는 것이다. 즉, 답을 내려놓고 이렇게 대답하라는 것이다. (예전 어떤 영화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범죄자가 아닌 사람을 두고 자백하라고 계속 고문을 가하자, 아무 죄 없는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체 계속 고통받다가 거짓말로 지어내서 자백을 하게 된다.) 지금 유대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악독한가? 지금 그들은 진정 자신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왜 자꾸 물어보십니까? 당신들도 그 사람의 제자가 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도대체 이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눈앞에 있는데도 어째서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인가? 사실 세상의 욕심은 그렇게 사람의 눈을 가린다. 도박이나 주식에 빠진 사람, 반복되는 쾌락에 빠진 중독자들, 혹은 달콤한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욕심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예전 어떤 사람은, 이미 사기꾼이 경찰에 잡혀있고 경찰이 그 사실을 전해주는 데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율법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대한 생각은 없고 오직 율법적으로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로만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부정한다. 이미 현실로 벌어진 일도 고집부리며 무시하려고 한다. 이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모든 삶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고침 받은 사람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분명 아들을 고쳐주신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예수님을 믿는 순간 출교당하는 현실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을 보고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복음을 무시하고 외면한다. 성명 말씀이 진리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씀에 순종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 예수님께 고침 받은 사람이 말한다.
“이상하다”
너무나 확실한데, 왜 믿지 못하냐고, 왜 그렇게 살지 못하냐고 반문한다. 성경 말씀을 보면, 또 내 삶에 함께하시며 역사하신 일들을 보면 너무나 명확하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왜 믿음대로 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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