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11장 17~35절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해 보니, 이미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 지가 이미 4일나 됐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라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리를 들은 마르다는 곧바로 나와 예수님을 맞았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아쉬움을 내비친다.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동일하신 뜻 같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나사로가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나사로가 죽은 후 다시 살리시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하여 이제야 베다니에 도착한 것이었다.
마르다는 분명 예수님을 믿는 자였고,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마르다의 믿음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
마르다는 마지막날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부활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특히 현재에도 부활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즉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신다. 마르다의 믿음을 위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이 부활이시며 생명이심을, 그리고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이 영생을 얻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 땅에서 죽고 이후에 영원히 산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에는 ‘그가 죽은 후에 살아나겠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가 원어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로 번역해야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그 생명을 막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뒤에 말씀도 이와 같다. ‘살아서 믿는 자’ 역시 같은 뜻으로 ‘육신의 몸이 살아있을 때 믿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살아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말씀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육신이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 것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마르다는 이 말씀에 대해 믿음의 신앙 고백을 한다.
“네. 주님. 주는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로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은, 그 믿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있다. 불신자들의 공격도 항상 그곳을 향하고 있다. 말하는 것과 삶이 다르다는 것이다.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통해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대로 살지 못하는가? 영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가?
사실 이것은 안타까우면서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우리의 모습을 계속 완전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꿔가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지금도 계속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설명해 주시고, 경험하게 해 주신다. 그렇게 믿음을 한 단계 한 단계 자라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점점 더 말씀을 체험하며, 조금씩 더 자라나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육신이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 것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이 죽음의 슬픔은 죄의 슬픔과 같다.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고, 그 죽음이 우리와 사랑하는 사람을 갈라놓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슬픔을 해결해 주셨다. 우리 믿는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믿는 사람의 죽음이라면, 우리가 다시 만날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음이 슬픈 것은, 우리가 당분간 헤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의 ‘그 이틀’의 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믿게 하시려고 그 시간을, 우리를 위하여 기뻐하신다고 하셨다(15). 우리는 죽음의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다시 만날 소망을 붙들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키우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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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큐티
2020년 2월 13일 큐티 / 요한복음 11:17-37
믿음이 벽에 막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신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져있는 두 자매는 분명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 죽을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과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는 불신이 섞여 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죽음이라는 벽에 막혀버린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마르다, 마리아의 모습이 겹쳐진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이런 믿음의 벽이 있다. 믿음의 길로 잘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안 믿는 사람처럼 반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일은…, 그 건은…, 이럴 때는….”
나의 믿음의 벽은 어떤 것인가? 어떤 일을 만날 때, 혹은 어떤 상황들이 나를 지배하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이 물음에 믿음으로 대답했지만 무덤을 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불신앙을 드러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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