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10장 11~21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진리·생명, 참포도나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7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나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그러나 ‘삯꾼’은 그렇지 않다”
선한 목자의 특징을 말씀하신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앞서 말씀하신 목자의 조건이 ‘문’을 통해 양과 만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지 선한 목자가 됨을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삯꾼’을 설명하신다. 앞에는 목자가 아닌 도둑과 강도가 왔었다면, 이제는 목자인 척하는 ‘삯꾼’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도둑이 좀 더 노골적이었다면, 삯꾼은 더 은밀하게 숨어있다. 평소에는 선한 목자와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양이 위험할 때, 즉 이리가 나타났을 때가 되면 삯꾼과 선한 목자는 완전히 구분되어 나타난다. 삯꾼은 말 그대로 그 값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사실 양들도 자신의 양이 아니라서 알 바 아니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아들이신 예수님을 주셨기에, 우리를 더 사랑하셨다고도 할 수 있다.)
“또 내게는 이 양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도 있어서, 그들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듣고 한 목자 아래 한 무리 양 떼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방인 선교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있다.
“내가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께 받은 명령인데, 내가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그 명령을 행함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목숨을 버리시는 일’인 십자가 구속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독자적인 의지로 행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는 분쟁이 일어난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귀신 들려 미쳤다고 그 말을 듣지 말라고 했고, 소수의 어떤 사람은 귀신 들리지 않았다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오늘 말씀에는 삯꾼이 나온다. 우리는 삯꾼인가? 선한 목자인가? 생각해 보라.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삯꾼이다. 다들 ‘일한 만큼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하라고 하면, 주인 대접을 해달라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삯꾼이 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삯꾼인가? 선한 목자인가? 우리는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양임을 알아야 한다.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우리가 하나님의 양을 맡아, 우리 자신의 양처럼 돌봐줘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한 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목자로써 양들을 돌봐야 한다. 월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셔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모두 우리 목숨을 걸고 섬겨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명에 대해 스스로 순종하심을 말씀하신다. 누구도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지만, 스스로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의 순종도 그래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그렇게 지고 가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많은 복을 약속하셨다. 그 복을 위하여 순종하는 것도 현명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원하여 순종해야 한다. 계산적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물론 그때가 한 단계 더 성장할 때일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시는 자를 사랑하시고, 고민되고 힘들더라도 그 순종의 길을 걸어가길 원하신다.
하지만 그 순종의 길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신다. 아니 사실은 우리를 업고 가시는 것이다.
옛날 어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고 가시면서, 무거운 짐을 계속 들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본 한 청년에 할아버지한테 말했다.
“할아버지. 버스에 타셨는데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내 짐인데 내가 들어야지. 내 몸무게도 무거울 텐데, 버스한테 다 맡기면 미안하지”
… 그냥 지어낸 이야기다. 사실 이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이 할아버지처럼 미련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는 더 편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순종의 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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