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 18장 1~14절

예주아부지 2025. 3. 4. 11:46

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18장 1~14절

1 예수께서 이 기도의 말씀을 하신 뒤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제자들은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간복음에서 나오는 겟세마네 기도가 빠져있다. 아마도 이 전까지의 기도로 겟세마네 기도를 대체시키고 있는 듯하다. 겟세마네 기도를 통한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뇌를 빼고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위엄과 그 말씀의 내용을 이어가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인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시점에 따라, 특정 세 명의 제자와 기도하신 후 다른 제자들과 다 같이 있었던 것이다.

2 그곳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던 곳이어서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가끔 모이던 곳이기에 가룟유다도 알고 있던 장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던, 그 가르침을 받던 장소로 군인들을 데려올 수 있던 것이다.

3 유다는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횃불과 등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 대해 밝히고 있다. 로마 군인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은 횃불과 등불, 무기를 들고 왔다. 예수님을 무력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예수께서는 자기가 당할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아셨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그들을 맞으셨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아 잡으러 온 유대인들을 피하셨었으나, 이제는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어쩔 수 없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일부러 체포되셨음을 알 수 있다.

5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 배반자 유다도 그들과 함께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공간복음에서는 유대의 입맞춤이 나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묻고 답하심으로 유다의 사인이 필요 없어 보인다. 아마도 유다의 사인 후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의 배신보다는 예수님의 권위적인 모습을 더 강조했던 것 같다. 결국 유다의 배신은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그리 큰 역할을 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는 앞서 말씀하신 대로 구약 성경에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주는 것이다.)

6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하시자 그들은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그들이 땅에 엎드려졌다. 로마 군인이 무기를 들고서도 감히 예수님을 붙잡아 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붙잡히셨음을 다시 한번 밝히고 있다.

7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보내 주라.”

다시 한번 반복되는 질문과 답변이다. 이로써 확실히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 붙잡히지 않았던 이유가 나온다. 마가복음 14장 50절에서는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나와있으나 그렇다고 이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보호하셨어도 제자들은 두려워 도망쳤을 것이다.

9 이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7장 12절에서 밝혔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예언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님 말씀이 성경의 권위와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0 그때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다른 공간복음에서는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은데,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라고 명확하게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공간복음이 기록된 시기에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미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훨씬 후대에 기록된 말씀이기에 문제가 없었기에 이름을 밝힌 것 같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귀가 잘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이름도 밝히고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11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아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칼을 치우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마태복음에도 나온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메시아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내용과 치료의 내용 모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말씀하신 것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겟세마네 기도에 등장하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께서 주신’이라는 말씀으로 이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2 군인들과 천부장과 유대 사람의 경비병들이 예수를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묶어서
13 먼저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그때 왔던 군인이 천부장이었음을 밝힌다. 천부장은 말 그대로 1000명 부대의 지휘관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로 온 군인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또한 적은 숫자였다면 엘리트 병사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을 왜 가야바에게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안나스는 대제사장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고 그 사위가 그해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14 가야바는 전에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조언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11장 50절에 나왔던 가야바의 발언이 다시 한번 조명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유익’ 한 일이 되었음을 밝힌다.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이 고난에 대해, 영광이라고 하셨다. 사명은 실제적으로는 고난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우리 삶의 고난도 그 어려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통해 성장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나타낸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도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악행도 예수님의 사명을 막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악한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용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들에 대해 불만이나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기도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악한 일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거나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일들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고난을 배워야 한다. 삶의 어려움 가운데 더욱 힘써 하나님 뜻을 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맡길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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