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 21장 1~14절

예주아부지 2025. 3. 14. 11:09

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21장 1~14절

1 그 후 예수께서는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그 나타내심은 이러합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지역의 수도다. 따라서 갈릴리 바다라고도 하지만 디베랴 바다로도 불렸다.

2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인 나다나엘, 세베대의 두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요한과 야고보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그의 겸손한 성품으로 인한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두 제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는데, 빌립과 안드레로 추측하기도 한다(어부 출신).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같이 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인 것 같다(마 28:10, 16).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듯한 기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나, 아직 제자들은 사명을 깨닫지 못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셨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사명을 깨닫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도 없다.

제자들은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부 출신이며, 밤 때가 가장 물고기가 잘 잡힐 때인데도 제자들은 물고기를 낚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4 날이 밝아 올 무렵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밤에서 새벽으로 되는 시점에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셨다. 예수님은 예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같이 홀연히 나타나신 것 같다. 그리고 좀 어두워서 인지(바닷가라 안개가 끼었을 것이다), 생각지 못했던 것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또 알아보지 못했다.

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물고기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근하게 제자들을 부르신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신줄 몰랐기에, 그저 오지랖이 넓은 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아셨지만, 이야기를 이어가시려고 질문하신 것 같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9절).

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라. 그러면 물고기가 잡힐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자 물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배 안으로 들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7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이시다!” 시몬 베드로는 “주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벗어 두었던 겉옷을 몸에 걸치고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고기를 가득 잡았을 때, 그때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한다. “예수님이시다!” 베드로는 어땠을까? 처음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눅5:1~11)가 떠올랐을 것이다.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입고 물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겉옷을 벗는 것이 편하겠지만 예수님께 벗은 상태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나타난다.

8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배를 탄 채 물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습니다. 배가 바닷가에서 약 200규빗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달리 다른 제자들은 배를 타고 예수님께로 향했다. 이미 배가 육지와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물을 배에 올릴 수도 없던 것 같다. 베드로 또한 물고기로 인해 시간이 지체될 것을 알고 물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갔던 것 같다. (물고기를 가져오는 일은 다른 제자에게 맡긴 것 같다.)

9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해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숯불 위에는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 놓으셨다. 물고기와 떡을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식사 교제를 나누시려고 했던 것이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방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육지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물 안에는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들어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이렇게 많았는데도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셨는가? 먹을 생선이 부족해서이거나 급한 일을 처리하라고 하신 뜻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이나 먹이셨었고, 또 예수님과의 교제시간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눅10:42). 따라서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를 확인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는 11절 내용으로 물고기를 잡은 결과만 기록하고 있고 그 물고기를 가져가 요리한 내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밤새도록 실패했던 경험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뚜렷하게 비교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맡길 소명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15~19절).

1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으라.” 다들 그분이 주이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 중 감히 그분께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3 예수께서 오셔서 빵을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습니다.
14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 먹으라”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생선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지만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째로 만난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나 제자들의 삶은 그대로였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저 전부터 하던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밤새 노력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그때 주님이 찾아오셨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도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알고는 있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많은 것이다. 그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처음 만난 주님을 떠올리게 하신다. 그리고 지쳐있는 우리를 정죄하시고 혼내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신다.

말씀을 보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정신력을 강조하거나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지친 엘리야에게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천사를 통해 떡과 물을 주셨고,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을 때도 이해해 주셨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먹이셨고, 육체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다. 유두고는 설교말씀을 듣다가 졸아서 떨어져 죽었지만 사도바울을 통해 다시 살려주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챙겨주시고 또 잘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우리도 우리의 육신을 무시하면 안 된다. 믿음으로 정신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이적을 강요하여 무리하게 우리의 육신을 던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피곤한 우리에게 단잠을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를 밤낮없이 괴롭게 하는 직장 상사가 아닌 것이다.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를 맡긴다는 것은, 마치 고장 난 기계를 기술자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 오랫동안 사용해 온 사용자 입장에서 기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기계를 만든 기술자가 더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어쩌면 우리 보다도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약한 모습까지도 다 알고 계시며, 우리의 한계도 더 잘 아신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가장 좋게, 가장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 창조받은 목적대로, 받은 사명을 잘 이루고, 하나님과 영원한 평안으로 나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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