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큐티
요한복음 3장 22~36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4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이다. 이는 이후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하게 될 것을 아시고, 미리 훈련을 시키시는 것 같다.)
그리고 세례요한도 멀지 않은 곳(요단강 저편이라고 26절에 나온다)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근처에 세례를 주는 일이 겹치다 보니, 세례요한의 세례를 영업(?)하던 세례요한의 제자와 예수께 세례를 받으러 가던 유대인과 논쟁이 생긴 것 같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것 같다. 세례요한은 참된 자로써, 예수님이 인정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 11:11)며, 겸손하며 검소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지 않은가? 거짓 경건된 선생들이 많던 그 시대에 진정한 선생님이었기에 더욱 제자들은 선생님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세례요한이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했는 데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세례계(?)의 후발주자요, 따라쟁이(?) 같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 등으로 예수님의 호칭을 피하고 있다.
“아니, 선생님. 전에 선생님께 와서 세례 받던 그 사람이 선생님처럼 세례를 주는 데 이게 맞습니까? 선생님께 오던 사람들이 다 저쪽으로 간다고요!”
세례요한이 제자에게 대답한다.
“세례를 주는 자격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 내 소관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께 사람들을 인도할 뿐이다. 오히려 너희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하지 않니?”
세례요한은 자신을 열심히 따르는 제자들을 보며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자들이 자신이 하는 사역에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8장 24절에 보면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아볼로도 요한의 세례 밖에 몰랐다. 이를 보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의 도를 알려주고, 이후 사도바울이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려주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했다.(행 19:1~1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지만, 신랑의 심부름을 하는 들러리는 그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지 않니? 그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들러리 역할 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신랑이신 예수님은 더 흥하여야 하고,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한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명확히 알고, 또 나아갈 방향(점점 사라져야 하는 것)도 알았다. 모세가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중제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처럼(출 19:17~25), 바울이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고후 11:2),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지만, 나는 땅에서 태어난 피조물에 불과하여 완벽하지 않은, 제한적인 것만 행할 뿐이다.”
세례요한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만물보다 먼저 계셨으니, 하늘에서 친히 보고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주시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
세례요한은 계속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준다.
전에 기도회 때 메시지를 전하고, (기도회가 끝나고 나서) 어떤 분에게 ‘메시지가 좋았다’고 칭찬을 들은 기억이 있다. 부족한 메시지에 대한 위로 차원의 이야기였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송구할 따름이다. 민망하다. 왜냐? 사실 나는 내가 전한 메시지 대로도 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나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얼마나 경건하고 성숙하게 보일 것인가. 그렇기에 그런 칭찬을 그냥 받아들이게 되면,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니까 좋은 메시지란, 듣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메시지어야 한다.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시지를 통해 듣는 사람들이 메신저를 보는 순간, 그 메시지는 실패한 것이다. 오히려 죄를 짓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을 때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끝은, 세례요한처럼 점점 쇠하여야 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 육신처럼, 우리의 영향력도 점점 더 약해져야 한다. 이 땅에서 자연스럽게 퇴장해야 한다. 우리가 남길 것은 우리의 제자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다. 내 뜻이나, 내 철학, 내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고 남겨줘야 하는 것이다.
훗날 천국에 갈 때쯤 날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대신 내가 전해줬던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때 얼마나 기쁠 것인가? 정말 내가 하나님만을 위해 일했다고 하나님께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그 기쁨의 순간을 꿈꾼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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